남대문경찰서를 방문한 건과 굶주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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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4년 1월, 나는 다시 남대문경찰서를 찾아갔다. 1년 만의 방문이었다. 이번에는 지인이었고 이유는 같았다. 나는 그녀를 ‘통신매체 음란’의 죄목으로 신고했다. 함께 아는 파트너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망설였냐 하면 별로 그러지는 않았다. 첫째로, 나는 스스로가 소중함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인지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둘째로, 내가 믿는 민주주의란 이런 것이기 때문이다. 소중함의 노예와 내가 믿는 민주주의가 대체 뭔지는 뒤에서 지리멸렬할 정도로 자세히 적을 생각이다.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주절거릴 것이다. 메시지를 받은 당일에 경찰서를 가려 했는데 시간이 늦어서 다음날 아침에 부리나케 찾아갔다. 23년 1월에는 신고 자체가 불가능했는데 24년 1월에는 신고의 기준이 다소 무난하게 충족됐다. 수미상관의 미학을 향한 섭리 같은 것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사람은 삶을 글로 써 내려간다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가 옳은 것 같다. 사람은 글을 살아갈 뿐이다. 나는 스스로가 남대문경찰서 글의 작가라고 생각했는데 그 반대가 오히려 참이었다. 남대문경찰서 글은 독립적으로 자라나고 있었고 나는 그 글을 적어 내려가는 살아있는 키보드였을 뿐이다. 세상에 신이 있다면 두 종류가 있을 것이다. 달리기의 신과 문학의 신이 그들이다. 이 둘은 대립하고 투쟁하며, 화합하고 어울리며 세상을 이끌어간다. 달리기의 신과 함께하며 사람은 거대한 덩어리 안에 편입된다. 남산에서 달리기를 하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진다. 태아일 때 느꼈을 평온함이란 대략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을 때가 있을 지경이다. 운동의 핵심이란 차분함에 기반한 치열함이다. 극도의 이완과 극도의 각성이 공존하고 교차하며 화음을 만든다. 이 곡조의 음역대가 넓어지며 내 자아 또한 점점 팽창해간다. 아무튼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건 치열함의 기반이 되는 차분함에 대한 것이다. 명치뼈를 박차고 뛰쳐나올 것 같은 심장의 박동 속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평온하게 삶을 관조한다. 이 고요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나는 달리기의 세계를 떠올린다. 지금껏 지구에 태어나고 죽어갔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육지동물들은 달리기를 해왔고 또 하고 있다. 달려서 누군가를 죽였고 달리다 잡혀서 누군가에게 죽었고 달려서 살았으며 달리다 죽었다. 그 모든 기쁨과 희열, 슬픔과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죽이는 동물도 죽어가는 동물도 달리기의 신 안에서는 하나다. 나의 달리기에는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 결코 개별적이지도 않다. 달리기의 신만이 숙주들을 타고 넘어 영원히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달리기의 무한한 우주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완벽하게 무의미해지는 것인데, 이 무의미함만큼 나를 위로하는 것은 없다. 이 안에서 내 자아는 중요하지 않은 걸 넘어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도마뱀 한 마리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 도마뱀은 다리의 근육통에서 시작해 머리까지 올라가 뇌에서 도파민을 뽑아내고 그것을 다시 몸 구석구석에 뿌린다. 성경의 신이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 이런저런 언짢은 일들을 겪은 것처럼 달리기의 신은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되어 내 몸 안을 헤집는다.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동물들의 달리기가, 그 무한한 수의 다리들이 나와 함께 달려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 짧은 순간 속에 영겁의 기쁨과 희열, 슬픔과 고통이 담기는 것 같은 기묘한 상상에 빠진다. 문학의 신과 함께하며 사람은 고유하고 개별적인 존재가 된다. 글을 읽고 쓰며 나는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고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인간이 된다. 어느 누구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다. 나라는 존재의 특수성은 어떤 보편적인 가치보다 중요하다. 문학의 신은 나의 삶에 개별성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서사창작을 향한 그녀(문학의 신은 왠지 여성일 것 같다)의 집착적인 노고에 나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대문경찰서의 따분한 서사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내심 애태우다 이런 결단을 내렸던 것인가? 그러면 나에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메시지를 보낸 지인이 한 일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그녀의 자유의지에 문학 여신의 손길이 개입했던 걸까? 그러면 나는 기꺼이 문학 여신의 전령이 되어준 지인에게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야 하는 걸까?
2.
이번에는 왜 신고를 했던가? 지인을 골탕 먹이다 못해 고통스럽게 만들고 싶었는가? <남대문경찰서 3>에서 적은 것처럼 이런저런 간사한 생각들로 즐거워했는가? 사람의 의도라는 게 워낙 심층적인 것이고 그중에서 정작 엔진의 역할을 하는 건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며, 그럴수록 선한 의도를 과시하며 나와 타인을 기만하느라 바쁜 것이지만, 이번에는 훨씬 더 복합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고, 이렇게 글을 쓰면 조금은 명확해질 것 같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분명하게 말가능한 건 단지 이런 것이다. 내가 신고한 지인은, 내가 그녀를 본 건 살면서 단 한 번뿐이지만, 내게 꽤나 쨍한 선량함을 보여준 바 있었다. 3개월 정도 지나서 나는 또 다른 지인을 모욕죄로 신고했다. 이 두 건의 신고는 나로 하여금 공동체에서 완전히 추방되게 만들었는데, 추방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하고, 아무튼 모욕죄로 신고한 지인 또한 좋은 사람이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통신매체 음란죄로 신고한 지인을 A, 모욕죄로 신고한 지인을 B라 하자. 개인적으로는 B에 대한 호의가 더 깊었고 그를 신고하기 얼마 전 나는 일기에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나는 B를 썩 좋아한다. 그가 과시하듯 꾸며낸 시니컬함과 그 안으로 내비치는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의 따스함이 좋다. 외로움과 공허함으로 가득 차 갈증에 허덕이는 눈동자가 좋다. 헛헛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달렸지만 결국 어디서도 그런 걸 채워낼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은 허무함이 서린 표정이 좋다. 그는 함께 집에 가는 길에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그의 조언은 썩 진부했고 나는 애초에 오프라인에서 누군가의 조언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지만, (나는 활자로 된 조언만을 수용하며 죽어서 육체적 실존을 잃은 이들의 조언에는 상당한 가점을 부여한다) 그가 뭔가를 알고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 마음 자체는 몹시 고마웠다. 이런저런 학원을 다녀보거나 기술을 배워보는 건 어떻겠냐는 그의 조언에 대해 많이 고민해 보겠노라고 이야기하며 생각했다. 그가 말한 종류의 공부와 기술을 배우는 것 두 가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말아야겠군. 그의 조언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줬다는 측면에서 탁월했고 이 방식에서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허망함이 확연히 옅어진 것을 느껴서 나 또한 기뻤다. 다음부터는 그를 만날 때마다 기갈이라도 들린 듯이 조언을 구해 갈증에 허덕이는 그를 도와주겠노라 다짐했다. 선량한 이들이 왜 이런 모종의 일탈 같은 걸 하느냐? 나는 오히려 선량하기 때문이라고 이들을 변호하고 싶은 심정이기까지 하다. 선량한 이들은 자잘한 실수에 약하고 악랄한 이들은 고의적인 악덕에 약하다. 아무튼 내가 이들의 신고자인 동시에 변호인이 되고 싶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싶다. 누군가 이들을 인격적으로 비난한다면 나는 그에 맞서 최선의 격렬함으로 싸울 생각이다. A에 이어 B까지 신고한 이후에 꽤 시간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둘 모두의 친구였던, 내가 가장 아끼던, 그러나 두 건의 신고로 나에게서 멀어져 버린 K가 연락을 해왔다. 그는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이렇게 거절했다. 저는 누구 앞에서도 B를 욕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도 없었구요. 아, 물론 A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저번에 형이랑 둘이 만나서 A 이야기를 하는 게 꽤나 곤란했어요. 이건 어쩔 수 없는 이간질입니다. 저는 그러고 싶지가 않네요.
별로 대수롭지도 않은 일들을, 수사관에게 이미 전말을 다 털어놓은 일들을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호들갑 같아요.
그리고 저는 도덕적인 우위를 점하고 싶은 마음도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A, B 가 좋은 사람이란 걸 왜 모르겠습니까? 저와는 비교할 수없이 좋은 사람들이죠. 제가 스스로의 선량함을 과시해야 하는 상황이 싫습니다.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깎아 내려가면서 말이에요.
이건 꽤나 잔인한 컨셉의 대화예요.
3.
<남대문경찰서 4>로 되돌아가 보자. 23년의 여성청소년 수사팀에는 단단하다 못해 조금 무서워 보이는 팀장과 부드럽다 못해 다소 유약해 보이는 인턴이 있었다. 1년이 지나 돌아간 남대문경찰서의 여성청소년 수사팀에 팀장은 없었고 그게 좀 아쉬웠다. 인턴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자꾸 힐끔거리며 쳐다보다가 화급히 눈길을 피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인턴이 맞는다면, 그는 한겨울의 새벽녘 같은 남자였다. 시퍼렇게 벼려진 추위 속에서는 폭염주의보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다. 영원할 것 같은 1월의 냉기처럼, 그는 영구불변한 인턴일 것 같았다. 그는 노련함이라는 점근선을 향해 뻗어 가지만 절대 닿을 수는 없는 함수인 것이다. 노량진 고시식당에서 끼니를 때우며 경찰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는 고시식당의 잔치국수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특유의 무던함과 포근함, 범상함으로 지친 수험생들의 내면을 달래줬을 거야. 그가 경찰이 됐을 때는 누구도 감히 질시 같은 감정을 느끼지는 못했을 거야. 인턴을 포함한 3명의 경찰이 나를 둘러싸고 신고를 안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이 정도로는 쉽지 않다, 처벌하기 어려울 텐데 굳이 해서 뭐 하냐, 친구를 잃을 거다, 같은 요지로 기억한다. 전화를 해줄 수는 있다고 했다. 전화요? 전화로 무슨 말씀을 하신다는 거죠? 전화로 그녀에게 훈계를 해준다고 했다. 나는 경찰서에서 이제는 좋은사람들 흥신소 역할까지 담당하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에 어안이 좀 벙벙해졌다. 그리고 이 의아함은 후에 언론사에 투고하는 과정에서 다시 쓰이게 되는데, 그건 역시 나중에 다루도록 하고, 아무튼 중요한 건 3명의 경찰이 화해하거나 침묵하기를 권장하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나는 신고를 빌미로 화해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거야말로 가장 궁색한 위협 아닌가? 너 사과 안 하면 신고한다? 라고 우쭐대는 것만큼 초라한 게 또 있나. 그렇다면 경찰들이 불의했는가? 관료주의와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정의를 괄시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그들이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또 꽤나 성실하게 잘 해냈다고 생각한다. 경찰들이 보기에 이 사안은 지나치게 경미해서 소모적인 수준이었을 것이다. 법적인 영역 밖에서 해결하는 게 옳다고 봤을 텐데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전화를 해주겠다느니 그냥 넘어가는 게 좋지 않겠냐느니 하는 조악한 제안들만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이건 분명 그들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후에 불송치 통보를 받고 이의 신청서를 쓸 때 강조했던 부분인데, 이 또한 나중에 다룰 텐데 조금만 적어보자면, 민주주의는 토론을 숭상하는 종교다. 정의는 누구에게도 귀속되고 점유되지 않으며 그저 토론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입증해낼 뿐이다. 나도 경찰도 메시지를 보내 신고를 당한 당사자도 정의를 독점하지 않는다. 그저 세 주체가 토론하는 과정 자체에서 정의의 조각들이 바스락거릴 뿐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적는 것 또한 그렇게 산개한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경찰에 신고를 한다는 말과 토론을 중시한다는 말은 양립할 수 없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이런 발상이야말로 민주주의와 토론에 대한 철저한 오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신고를 할 정도면 이미 경찰서 밖에서는 토론 자체가 불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봐야 한다. 경찰서를 필두로 한 사법체계는 공권력을 동원해 당사자들을 토론장에 불러 앉힌다. 나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신고와 갈등을 사갈시하는 사해동포주의 혹은 박애주의야말로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1년 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신고를 하기로 한 다짐이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처럼 허무하게 녹아버렸을 것이다. 이게 뭐라고, 한 번 찾아가 상담을 받아봤을 뿐인데도 훨씬 수월했다. 정말이지 뭐든지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살아야 하나보다, 실패를 향해 달음질치며 살다 보면 그렇게 수집해 놓은 실패들이 꼭 결초보은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실패의 베일을 창안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실패에 들러붙은 구태의연한 오명을 벗겨내고 영광의 곤룡포를 덧입혔다.
4.
미덕과 가치, 그것을 추구하는 의지와 정신은 모두 법에 선행한다. 송치와 불송치의 여부, 처벌의 유무는 중요치 않다. 공권력은 공권력의 일을 할 것이고 나는 나의 일을 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흉포한 곳인지에 대한 성토가 계속되는다. 나도 그런 측면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은 점도 많다. 대안이 딱히 있지도 않다. 사회란 늘 어느 정도는 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 사회를 성토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본인은 흠결이 전혀 없는 순백의 피해자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한다. 본인의 온갖 불행과 고충의 이유가 전적으로 사회의 탓인 것처럼. 나는 이들이 현대적 내세 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부조리와 불의가 없는, 천국과 같은 진공의 사회를 상정한다. 천국을 기준으로 삼으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미흡한 것을 넘어 추악해진다. 그 이유도 또렷하다. 천국이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삶이 이렇게 부당하게 폄훼된다. 천국이 도래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엉켜버린 삶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이 또렷함에 거의 혐오감을 느낀다. 한국 사회라는 독립적인 생명체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와 욕망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의 이분법은 이 의지를 도외시한다. 분명한 건 사회라는 개념은 생물학적 실체가 아니지만 개인은 그렇다는 점이다. 그렇게 온갖 문제들로 가득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방관하는 스스로의 무책임과 비열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사회라는 개념에서 개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제외하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사회, 개인의 이분법적 담론은 아무런 메시지도 전하지 못하고 공허하게 표류한다.
5.
바디프로필, 내가 싫어해 마지않는 바디프로필로 돌아가 보자. 거듭 말하지만 나는 바디프로필을 포르노 필름이라고 부르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1년 전쯤 미국에서 여행을 온 관광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화제는 운동 문화에 가닿았다. 한국의 운동 문화에 대해 묻는 그녀에게 나는 온갖 몸짓을 섞어가며 이런 메시지를 전했다. 한국에서는 지금 누드 사진을 찍는 유행이 성행하고 있어. 사람들이 속옷만 입고 사진을 찍어. 이상한 표정도 짓지. 응? 누드 사진을 왜 찍는 건데? 어떻게 그런 걸 하지? 이들의 운동에는, 정신이랄까, 그런 게 없는 것 같아. 보여주는 데 미쳐있기 때문에 포르노를 찍게 되는 거야. 이건 일종의 카르텔이기도 해. 김둘레순대국에 감탄을 금치 못하던 그녀는 다시 한번 미국인 특유의 과장된 리액션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바디프로필이 포르노 필름이라 이야기했는데 사실 그것보다 훨씬 못하다. 나는 일본의 야동을 즐겨 봤기 때문에 그것들을 근거로 이야기해 보겠다. 바디프로필에는 야동의 프로페셔널함과 압도적 완성도가 없다. 야동의 세계란 얼치기 예술가들이 와서 까불 정도로 호락호락한 곳이 결코 아니다. 이곳은 극단적인 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우생학적 탁월함의 세계다. 성적 쾌락의 이데아를 향한 유미주의적 돌진.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 올곧은 탐닉. 천재적 재능의 위압감. 야만의 땅에서 피어나는 예술의 잡초들. 바디프로필에는 대체 무엇이 있는가? 우생학적 탁월함에 대한 조악한 동경 말고는 별로 생각나는 게 없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바디프로필을 찍는 것만으로도, 그 킹받는 표정과 민망한 몸짓을 여기저기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선봉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바디프로필 반대 집회라도 열고 싶은 심정이다. 안티 바디프로필 연대를 규합하고 싶다. 바디프로필을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 주인공에게 따져 묻고 싶다. 대체 왜 이런 조악한 포르노를 찍었습니까? 당신이 왜? 당신이 그렇게 하찮은 인간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속옷만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저렇게 얼토당토않은 표정을 지을 만큼,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럴 만큼 상식이라고는 없는 인간이냐구요. 그리고 말입니다. 저런 표정과 몸짓을 어디서 배워 오신 거죠? 집에서 연습을 하셨습니까? 샤워를 하다 연습을 해보신 거냐고 여쭙는 겁니다. 양치를 하다, 머리를 감다, 세수를 하다 문득 거울을 노려보셨습니까? 아니요, 저는 당신이 거울을 노려보는 모습을 별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진을 보면 그런 걸 상상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무력한 거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갑갑합니다. 이 상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구요. 당신은 저를 불쾌한 크레바스에 빠뜨렸습니다. 됐어요. 이미 빠져버린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꼭 드려야겠군요. 더 이상 저를 비롯한 불특정 다수를 불쾌한 크레바스에 가두지는 말아 주십시오. 화장실은 좀 신기한 공간입니다. 문명 속에 포섭되지 않는 것들을 이 안에서 해결하거든요. 이 해결이야말로 문명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화장실이란 숭고한 공간입니다. 그런데 문명의 여집합 속에 바디프로필을 준비하는 것까지 포함될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죠, 사실 제 불찰이지요. 제 상상력의 부재 탓입니다. 화장실을 너무 획일적인 공간으로 상정했던 거지요. 세정과 배설만을 위한 공간이 되기에 화장실의 잠재력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을 텐데요. 어쩌면 당신이 그 저변을 넓히고 있는 선구자일지도 모르는데요. 다 좋다는 겁니다. 저도 화장실에서 스스로에게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곤 해요. 맞아요. 화장실에서 보면 왜 이렇게 내가 잘생기고 멋져 보이는지. 화장실에 뭔가 있는 걸까요. 뭐가 있긴 한 것 같아요. 제가 지적하고 싶은 건 이런 거예요. 우리는 남들이 보는 데서 똥을 싸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오줌을 갈기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샤워를 하지도 않겠지요. 그런데 왜 그 표정과 몸짓만은 가지고 나오냐는 겁니다. 그건 화장실에서 해결해도 되는 거잖아요. 화장실에는 화장실의 일이, 화장실 밖에는 화장실 밖의 일이 있지 않을까요? 각자가 스스로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개인과 사회는 앞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을 해봐도 좋겠어요. 외과의사가 수술을 하는 것도, 소방관이 불을 끄러 건물에 뛰어드는 것도 모두 고귀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고귀함은 탁월함을 향한 강렬한 의지의 기반 위에서만 존립할 수 있습니다. 잘하기 위해 최선을 야 하고 다른 일에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본인의 역량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함부로 넘어 서려 해서도 안 됩니다. 외과의사가 성형수술까지 해서는 안 됩니다. 소방관이 방화범을 색출하는 일까지 도맡아 서도 안 되겠죠. 외과의사는 불을 끄러 나가는 수술실에서 혼신의 힘을 야 합니다. 소방관은 수술을 해서 사람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수술실까지 환자를 최대한 안전하고 신속하게 이송하는 데 최선을 야겠죠.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는 집착만큼 사람을 무능하게 만들고 일을 망쳐 버리는 게 또 있을까 싶네요. 저도 뭔가를 고백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는데요. 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에 주먹질을 하고 발차기를 합니다. 그런 제 모습이 몹시 멋지다고 생각해요. 거울 앞에서만 하는 건 아닌데 거울 앞에서도 꽤 많이 하죠. 당연한 얘기지만 눈을 부릅뜨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남성성 혹은 여성성에 도취되어야 하는 존재들이 아닐까요. 아 나는 그야말로 남성 혹은 여성이구나, 따위의 자각이 없이는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가 어려운 것 아닐까요. 이건 일종의 배설일지도 모르겠어요. 모든 동물은 단 하루도 배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좀 슬프기도 하네요. 우리는 모두 배설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진공의 세계 속에 사는 것처럼 연극 같은 걸 해야 합니다. 우리의 대장과 방광에 수시로 들어차는 삶의 증명을 애써 무시해야 하죠. 이건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인데, 그러니까 우리의 실존에 대한 그 무엇보다도 또렷한 외침인데, 우리는 그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군집생활을 하는 곳에서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않아 배설물과 일상이 구별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재앙입니다. 온갖 전염병이 창궐하겠죠. 그러니까 배설과 일상의 철저한 구분은 아무래도 축복이죠. 저도 늘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세상의 모든 빛은 그림자를 만든다는 거죠. 축복만으로 존재하는 실존 같은 건 없습니다. 이건 배설의 법칙 같은 건지도 모르겠네요. 축복 또한 배설을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군요. ‘배설과 일상의 분리’라는 문명의 축복조차 배설을 해야 한다는 거죠. 문명의 청결함이란 축복은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건 더러움에 대한 공포와 혐오입니다. 저만해도 공공화장실의 대변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실외 배변을 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요. 다행히도 소변기는 잘 이용해요. 정말 어쩔 수 없이 대변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바디프로필을 찍고 전시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의 숭고한 이상과 정신에 명백한 악영향을 끼친다. 이건 결코 개인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애초에 문명의 틀 안에서 온전히 개인적인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작디 작은 미토콘드리아 하나에서조차 공공재의 속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다. 방구석에서 내쉬는 날숨 한 조각조차 영원히 각인해 보관하는 것이 문명이라는 컴퓨터가 하는 일이다. 바디프로필을 찍는 것이 운동의 원칙을 짓밟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횡설수설을 했다. 그리고 원칙의 파괴 앞에서 사소함이란 존재할 수 없다. 원칙이 부서진 것 자체가 가장 커다란 사건이다. 바디프로필 스튜디오에 예약을 하는 순간 한 인간의 운동 세계는 도탄에 빠져 버린다. 나는 누군가 스튜디오를 검색하는 그 순간, 아니 인스타를 뒤지다 바디프로필을 찍어보겠노라 다짐하는 그 순간에 침입해 들어가고 싶다. 나는 다시 핏대를 세우며 외친다. 운동의 정신이 사멸해가는 걸 왜 당신만 느끼지 못합니까? 운동의 정신이 대체 뭡니까. 바로 공격성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삶의 고갱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영혼이라고까지 말하고 싶군요. 그렇습니다, 영혼은 공격성의 사회적인 명칭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 영혼없는 인간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겁니다.
6.
<남대문 경찰서 7>에 나오는 친구 M의 이야기도 해보자. 그가 처음부터 여자친구에게 발로 차이고 뺨을 맞지는 않았다. 장난처럼 뒤통수를 툭툭 치는 것에서부터 온갖 다채로운 폭행의 줄기들이 자라났다. 2년여간 지속적으로 구타를 당한 이유는 문제를 자각한 바로 그 지점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는 연인과의 관계에서는 피해자이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가해자였다. 도덕의 영역 안에서만 그는 무결하고 안전하다. 도덕의 울타리 밖에서 그는 스스로의 삶을 방임하고 도망친 겁쟁이고 사기꾼이었다. 도덕의 영역이란 어디인가? 이곳은 약자의 영토다. 그러니까 내 친구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약자의 영토 안에 숨어 들어가 무결함을 외쳐댔던 것이다. 그가 여기에서 뒹굴거리는 동안 그를 때리는 연인의 손아귀는 점점 대담해졌다. 나는 결론적으로 M의 비겁함과 나약함이 폭력의 나무가 자라는 토양과 햇살, 단비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머리를 맞고 발로 차인 개개의 사건들은 요란했지만 그 소음의 크기가 사안의 중요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원칙이 무너진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이 모든 사건들의 근간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훨씬 중요하다. M은 말했다. 나는 소중함의 노예가 되었던 거야. 소중한 걸 잃기 싫어서 노예가 되는 걸 개의치 않았어. 그런데 내가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노예가 되는 걸 서슴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로 그때야말로 소중함이 판판이 부서지기 시작한 시점이야. 무릇 노예란, 이유를 불문하고 소중함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야. 자발적인 노예가 되었다는 것, 이거야말로 관계에서 나의 원죄였어. 관계가 정말 소중했다면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지. <남대문경찰서를 방문한 건과 굶주림에 관하여-20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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